한대수, 영혼의 무게 4g을 담다.
늘 불안하고 멜랑꼴리한 오늘을 살던 청소년 시절, 낡은 라디오의 거친 주파수를 통해 들려오는 '행복의 나라로'는 한대수 특유의 컬컬한 보이스와 통키타의 빠른 템포가 인상적이어서 듣자마자 최고의 애창곡이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상존하던 당시, 호소력 있는 한대수의 목소리는 답답한 현실을 밝히는 희망가이자 인생찬가였다.
"고통뿐인 세상에 행복의 나라는 없었어. 울고 살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기쁨, 평화, 사랑을 찿는거라고..."
한대수 본인도 고통과 절망뿐인 세상을 향해 외치는 독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배시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의 나라로 가자던 외침은 역설이었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깨달았다.
인연은 의도하지 않은데서 자연스레 이루어 진다. 한대수와의 만남도 그랬다. LG아트센터에서 한대수 트리뷰트 콘서트 40주년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서 2011년 녹음한 '행복의 나라로'(LAST ver.)MV를 보았다. 젊은 시절의 노래와는 다른,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으며 허허실실 살아가는 사람 한대수와 귀여운 딸 양호가 있었다.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먹었다.
뉴욕의 유명한 사진학교를 나왔다는 그를 만나러 갔다. 집 앞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내게 ‘경제공황인데 왠 커피냐’ 며 집에서 인정한(!) 훌륭한 바라스타이니 고시원(한대수는 집을 고시원이라 부른다)에서 마시자며 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초상사진은 사랑과 존경 없이는 영혼의 깊이를 담을 수 없다. 한대수를 만나고 인연을 만들고 필연으로 엮이기 까지... 지금까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진정 행복이었다.
인간의 심오함을 시각화시켜 보여주는 포트레이트는 힘든 작업이다. 더군다나 '가수 한대수'가 아닌 '사람 한대수'다. 평소 존경해 오던 그를 만난 후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만남이 익을수록 기록에 대한 사진가의 욕구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굴곡이 많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한대수의 생을 영원의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마침내 허락을 받고 이 시대의 진정한 보헤미언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을 수 있었다.
한대수는 쉬운 피사체가 아니다. 까다롭다. 앨범 작업도 원테이크(One take)로 1~2번만에 뚝딱 녹음을 마치는 그다. 사진촬영도 “액션~~” 외치자 마자 바로 끝. 사진은 감정작업이다. 양질의 이미지는 친밀도와 비례하는데 그는 시간 끄는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 와의 첫 작업이었던 14집 자켓 커버도 처음 만나 스튜디오에서 10분만에 인스턴트로 처리했다. 그럼에도 포토제닉한 그는 고우면 고운대로 거치면 거친대로 셔터를 누르면 작품이 된다. 신기하다.
한대수를 알기 이전...
영국의 4인조 락그룹 Doolesy의 ‘Wanted’를 FM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pop에 푹 빠졌다. 신디사이저의 비트있는 인트로와 여성보컬의 파워풀한 보이스는 라디오에 한없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기타를 사서 ‘Romance’와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을 연주하던 음악 초보시절 조금, 대학에 합격하고 전문 음악다방 DJ를 하면서 음악은 호기심 어린 대상이었지만 세상밖으로 나오면서 관심은 카메라로 향했다.
음악을 좋아하던 어릴적 기억들과 사진에 대한 상상들이 보태져 오늘의 한대수를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족적을 남긴 뮤지션을 기록하여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지만 사진을 통해 나이를 초월한 사람 한대수의 내면과 만날 수 있었다. 시대의 관찰자이자 기록자가 된것이다.
‘대수형’이라고 부르라지만 아직은 어색하다.
더 깊고 넓게 담아내지 못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대수형님은 이 책을 통해 영생(永生)을 얻었다.
2017년 8월
원춘호
내가 원춘호를 알게 된지 3년이 되어간다. 대한민국국제포토페스티벌에 음악가가 아닌 사진가로 초대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첫 인상이 양호해서 몇 마디 대화 후 신촌집으로 초대하여 커피를 마시며 인연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기록하여 사진 작품집을 낸다는건 처음이다. 사진을 전공한 나로서 재미있게 생각했다. 가수 한대수가 아닌 일상인 한대수의 삶을 기록하고 싶노라는 그의 바램에 진정성을 느꼈다.
원춘호는 훌륭한 사진작가이며 아티스트며 기획자이다. 세 아이를 키우는 다둥이 아빠로 자기일을 열심히 하는 프로페셔널로서 무엇보다 젠틀맨이다. 신촌과 아현동 골목에서 만나 추억을 쌓으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오늘은 막걸리와 파전, 내일은 소주와 해물탕...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현동 골목에서 수 많은 밤을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사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게 무슨 대수로운가 내가 대수인데...
무엇보다도 양호와 같은 나이의 둘째 딸이 있어 가족끼리도 친해졌다. 우정이 무르익을 무렵 우리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오! 눈물... 하나뿐인 소중한 양호를 교육이 치열한 한국에서 죽어라고 공부를 시킬 수는 없었다. 이 할배가 뉴욕에서 택시 운전을 할지라도, 자유로운 공기에서 학교를 보내고 싶었다. 2016년 7월 30일,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
인생은 하루 하루 젊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루 하루 늙어지니까 지금이 아마 나의 최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며 오 주여!, 발가락이 움직이면 오 주여! 감사합니다. 기타를 치면서 손가락이 움직이면 오 주여! 감사합니다.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사건 사고 없이 하루를 평범하게 보낸 것에 감사를 드린다. 묘비명을 생각해 봤다. 첫 번째는 ‘사는것도 제기랄 죽는것도 제기랄’, 두 번째는 ‘괜히 왔다 가네’. 주변 사람들한테 말해 봤는데 재미있다고 난리다.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웃어본 적은 처음이다. 인생은 신기루이므로...
이 사진집에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 9개월의 기록과 예술의 전당 공연을 위해 일년만에 다시 찾은 이후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뛰어난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로서 원춘호는 사람 한대수를 잘 찍었다. 마치 앙리카르띠에 브레송을 연상케 한다. 페이지마다 고독과 고통과 막거리 냄새가 묻어 나온다.
원춘호, 감사하다!
Peace, everyone!
2017년 8월
한대수
누군가가 나를 기록하여 사진 작품집을 낸다는건 처음이다. 사진을 전공한 나로서 재미있게 생각했다. 가수 한대수가 아닌 일상인 한대수의 삶을 기록하고 싶노라는 그의 바램에 진정성을 느꼈다.
원춘호는 훌륭한 사진작가이며 아티스트며 기획자이다. 세 아이를 키우는 다둥이 아빠로 자기일을 열심히 하는 프로페셔널로서 무엇보다 젠틀맨이다. 신촌과 아현동 골목에서 만나 추억을 쌓으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오늘은 막걸리와 파전, 내일은 소주와 해물탕...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현동 골목에서 수 많은 밤을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사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게 무슨 대수로운가 내가 대수인데...
무엇보다도 양호와 같은 나이의 둘째 딸이 있어 가족끼리도 친해졌다. 우정이 무르익을 무렵 우리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오! 눈물... 하나뿐인 소중한 양호를 교육이 치열한 한국에서 죽어라고 공부를 시킬 수는 없었다. 이 할배가 뉴욕에서 택시 운전을 할지라도, 자유로운 공기에서 학교를 보내고 싶었다. 2016년 7월 30일,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
인생은 하루 하루 젊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루 하루 늙어지니까 지금이 아마 나의 최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며 오 주여!, 발가락이 움직이면 오 주여! 감사합니다. 기타를 치면서 손가락이 움직이면 오 주여! 감사합니다.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사건 사고 없이 하루를 평범하게 보낸 것에 감사를 드린다. 묘비명을 생각해 봤다. 첫 번째는 ‘사는것도 제기랄 죽는것도 제기랄’, 두 번째는 ‘괜히 왔다 가네’. 주변 사람들한테 말해 봤는데 재미있다고 난리다.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웃어본 적은 처음이다. 인생은 신기루이므로...
이 사진집에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 9개월의 기록과 예술의 전당 공연을 위해 일년만에 다시 찾은 이후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뛰어난 스트리트 포토그래퍼로서 원춘호는 사람 한대수를 잘 찍었다. 마치 앙리카르띠에 브레송을 연상케 한다. 페이지마다 고독과 고통과 막거리 냄새가 묻어 나온다.
원춘호, 감사하다!
Peace, everyone!
2017년 8월
한대수
한대수, 영혼의 무게 4g을 담다.
늘 불안하고 멜랑꼴리한 오늘을 살던 청소년 시절, 낡은 라디오의 거친 주파수를 통해 들려오는 '행복의 나라로'는 한대수 특유의 컬컬한 보이스와 통키타의 빠른 템포가 인상적이어서 듣자마자 최고의 애창곡이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상존하던 당시, 호소력 있는 한대수의 목소리는 답답한 현실을 밝히는 희망가이자 인생찬가였다.
"고통뿐인 세상에 행복의 나라는 없었어. 울고 살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기쁨, 평화, 사랑을 찿는거라고..."
한대수 본인도 고통과 절망뿐인 세상을 향해 외치는 독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배시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의 나라로 가자던 외침은 역설이었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깨달았다.
인연은 의도하지 않은데서 자연스레 이루어 진다. 한대수와의 만남도 그랬다. LG아트센터에서 한대수 트리뷰트 콘서트 40주년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서 2011년 녹음한 '행복의 나라로'(LAST ver.)MV를 보았다. 젊은 시절의 노래와는 다른,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으며 허허실실 살아가는 사람 한대수와 귀여운 딸 양호가 있었다.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먹었다.
뉴욕의 유명한 사진학교를 나왔다는 그를 만나러 갔다. 집 앞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내게 ‘경제공황인데 왠 커피냐’ 며 집에서 인정한(!) 훌륭한 바라스타이니 고시원(한대수는 집을 고시원이라 부른다)에서 마시자며 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초상사진은 사랑과 존경 없이는 영혼의 깊이를 담을 수 없다. 한대수를 만나고 인연을 만들고 필연으로 엮이기 까지... 지금까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진정 행복이었다.
인간의 심오함을 시각화시켜 보여주는 포트레이트는 힘든 작업이다. 더군다나 '가수 한대수'가 아닌 '사람 한대수'다. 평소 존경해 오던 그를 만난 후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만남이 익을수록 기록에 대한 사진가의 욕구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굴곡이 많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한대수의 생을 영원의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마침내 허락을 받고 이 시대의 진정한 보헤미언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을 수 있었다.
한대수는 쉬운 피사체가 아니다. 까다롭다. 앨범 작업도 원테이크(One take)로 1~2번만에 뚝딱 녹음을 마치는 그다. 사진촬영도 “액션~~” 외치자 마자 바로 끝. 사진은 감정작업이다. 양질의 이미지는 친밀도와 비례하는데 그는 시간 끄는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 와의 첫 작업이었던 14집 자켓 커버도 처음 만나 스튜디오에서 10분만에 인스턴트로 처리했다. 그럼에도 포토제닉한 그는 고우면 고운대로 거치면 거친대로 셔터를 누르면 작품이 된다. 신기하다.
한대수를 알기 이전...
영국의 4인조 락그룹 Doolesy의 ‘Wanted’를 FM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pop에 푹 빠졌다. 신디사이저의 비트있는 인트로와 여성보컬의 파워풀한 보이스는 라디오에 한없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기타를 사서 ‘Romance’와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을 연주하던 음악 초보시절 조금, 대학에 합격하고 전문 음악다방 DJ를 하면서 음악은 호기심 어린 대상이었지만 세상밖으로 나오면서 관심은 카메라로 향했다.
음악을 좋아하던 어릴적 기억들과 사진에 대한 상상들이 보태져 오늘의 한대수를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족적을 남긴 뮤지션을 기록하여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지만 사진을 통해 나이를 초월한 사람 한대수의 내면과 만날 수 있었다. 시대의 관찰자이자 기록자가 된것이다.
‘대수형’이라고 부르라지만 아직은 어색하다.
더 깊고 넓게 담아내지 못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대수형님은 이 책을 통해 영생(永生)을 얻었다.
2017년 8월
원춘호
늘 불안하고 멜랑꼴리한 오늘을 살던 청소년 시절, 낡은 라디오의 거친 주파수를 통해 들려오는 '행복의 나라로'는 한대수 특유의 컬컬한 보이스와 통키타의 빠른 템포가 인상적이어서 듣자마자 최고의 애창곡이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상존하던 당시, 호소력 있는 한대수의 목소리는 답답한 현실을 밝히는 희망가이자 인생찬가였다.
"고통뿐인 세상에 행복의 나라는 없었어. 울고 살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기쁨, 평화, 사랑을 찿는거라고..."
한대수 본인도 고통과 절망뿐인 세상을 향해 외치는 독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배시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의 나라로 가자던 외침은 역설이었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깨달았다.
인연은 의도하지 않은데서 자연스레 이루어 진다. 한대수와의 만남도 그랬다. LG아트센터에서 한대수 트리뷰트 콘서트 40주년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서 2011년 녹음한 '행복의 나라로'(LAST ver.)MV를 보았다. 젊은 시절의 노래와는 다른,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으며 허허실실 살아가는 사람 한대수와 귀여운 딸 양호가 있었다.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먹었다.
뉴욕의 유명한 사진학교를 나왔다는 그를 만나러 갔다. 집 앞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내게 ‘경제공황인데 왠 커피냐’ 며 집에서 인정한(!) 훌륭한 바라스타이니 고시원(한대수는 집을 고시원이라 부른다)에서 마시자며 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만남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초상사진은 사랑과 존경 없이는 영혼의 깊이를 담을 수 없다. 한대수를 만나고 인연을 만들고 필연으로 엮이기 까지... 지금까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진정 행복이었다.
인간의 심오함을 시각화시켜 보여주는 포트레이트는 힘든 작업이다. 더군다나 '가수 한대수'가 아닌 '사람 한대수'다. 평소 존경해 오던 그를 만난 후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만남이 익을수록 기록에 대한 사진가의 욕구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굴곡이 많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한대수의 생을 영원의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마침내 허락을 받고 이 시대의 진정한 보헤미언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을 수 있었다.
한대수는 쉬운 피사체가 아니다. 까다롭다. 앨범 작업도 원테이크(One take)로 1~2번만에 뚝딱 녹음을 마치는 그다. 사진촬영도 “액션~~” 외치자 마자 바로 끝. 사진은 감정작업이다. 양질의 이미지는 친밀도와 비례하는데 그는 시간 끄는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 와의 첫 작업이었던 14집 자켓 커버도 처음 만나 스튜디오에서 10분만에 인스턴트로 처리했다. 그럼에도 포토제닉한 그는 고우면 고운대로 거치면 거친대로 셔터를 누르면 작품이 된다. 신기하다.
한대수를 알기 이전...
영국의 4인조 락그룹 Doolesy의 ‘Wanted’를 FM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pop에 푹 빠졌다. 신디사이저의 비트있는 인트로와 여성보컬의 파워풀한 보이스는 라디오에 한없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기타를 사서 ‘Romance’와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을 연주하던 음악 초보시절 조금, 대학에 합격하고 전문 음악다방 DJ를 하면서 음악은 호기심 어린 대상이었지만 세상밖으로 나오면서 관심은 카메라로 향했다.
음악을 좋아하던 어릴적 기억들과 사진에 대한 상상들이 보태져 오늘의 한대수를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족적을 남긴 뮤지션을 기록하여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지만 사진을 통해 나이를 초월한 사람 한대수의 내면과 만날 수 있었다. 시대의 관찰자이자 기록자가 된것이다.
‘대수형’이라고 부르라지만 아직은 어색하다.
더 깊고 넓게 담아내지 못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고,
대수형님은 이 책을 통해 영생(永生)을 얻었다.
2017년 8월
원춘호
나는 올해 70살인데, 한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살아왔다.
생애를 돌아보면, 내 청춘의 먼 곳에서 한대수의 노래가 들려온다.
한대수의 목소리는 깊고 두껍고, 멀리 닿는다.
한대수의 목소리는 거친 입자들을 뿜어내는데,
그 소리의 입자들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 입자들은 눈보라와 같고 안개와 같다.
한대수의 노래는 내가 살아온 그 억압의 시절에 자유의 바람을 몰아왔다.
그의 노래 속에서, 숲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쏟아지고
구름이 걷히고 젖은 산맥이 햇빛에 번쩍였다.
한대수는 억압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고통 속에서 기쁨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우리들은 모두 한대수의 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몇해 전 연말에 세시봉 디너쇼에 갔더니 한대수가 나왔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얘졌지만 한대수는 여전히 멋있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손바닥이 깨져라고 박수쳤다.
그날 한대수는 "이제 나이 먹어서 하룻밤에 네 번 화장실에 간다"고 말했다.
나는 세 번 간다.
한대수의 자전 에세이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을 읽으면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의 사랑법은 사랑의 기쁨과 행복,
슬픔과 고통을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끌어안고 딩굴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들은 본래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한대수의 노래가 그러하다.
소설가 김훈
....................
스무살때 처음 그의 앨범을 듣고 문화적 충격과 동시에
영원한 팬이 되어버린 나는 그후 음악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실제로도 그를 선생님 ,때론 선배님, 때론 형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다정한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한 대 수.........
나의 20대를 지탱시켜준 예술가.
지금까지도 나에겐 아주 소중하고 양호한 영양분이다.
한 : "오 ! 강 산 에 ! 오랜만~~ !"
강 : "형님을 알게되어 영광입니다 !"
"양호합니다 !"
가수 강산에
....................
시대를 100년만 더 거슬러 가도
한대수 ㆍ대수형 같은 자유 영혼이 많았을 게다.
이 시대는 사람들의 자잘한 잘못에 용서가 없는ㆍ용납되지 않는
그리고 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인색한 ㆍ빡빡한 시절이다.
참 재미없는 시절이다.
신촌 아지트 같은 공간에서ㆍ옥산나가 임신했다고 배를 만져보라고
내 손을 잡아 붙잡아 확인 시킨-
그 시간이 한참 흘러 반짝거리는
꼬마와 범상한 어른 사이에 영혼이
함께 흐르는 해류를 만들어간다.
새론 생명은 지친 영혼에게
새 우주 에너지를 빌려온다.
마치 숲 속ㆍ산 - 파도ㆍ바다가 그렇다.
신나는 시간이 펼쳐진다.
같이 가고 싶다.
대수의 길, 대양의 길에...
사진가 배병우
....................
자유하는 노래는 생명이다.
자유하는 노래는 혁명이다.
자유하는 노래는 존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을 최상이라 했다.
경계밖에 있는 사람,
자유 밖에 있는 사람, 한대수,
이미 경계 밖에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자유 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할 수 있다. 정신이다.
삭막했던 원시의 시대, 그의 노래는 물이었고 생명이었다.
한 마디의 말을 더 하는 것을 경계한다.
한대수! 그를 존경한다.
아티스트 김 아타
...................
난 한대수를 '쌤'이란 애칭으로 부른다.
'선생님'은 식상하게 격식을 차린 호칭 같고 자칭 '로큰롤 할배'라지만
그러기엔 쌤의 유머가 너무 팔팔해서다.
2006년인가, 쌤과 첫 인터뷰 때다.
쌤은 우리 대화 내용을 녹음하려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토씨 하나 틀리면 쌤의 1집 재킷 속 표정처럼
흰자를 반쯤 드러내고 따질 심산으로 보여 내심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자 쌤은 카세트 테이프에 견출지를 붙여
'한대수 인터뷰'라고 쓰고는 날짜까지 박았다.
"20년 있다가 내가 죽었을 때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가 추억이 될 겁니다.
선물해줄게요. 이 정도면 양호하죠?"
어떤 만남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배려에 놀랐고 생각지도 못한,
아날로그적인 선물에 감동했다.
되돌려 보면 쌤은 기록을 무척 좋아한다.
때론 기타와 투박한 목소리로, 카메라 렌즈로, 펜으로
시시콜콜한 개인사부터 세계 평화와 반핵,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등
거시적인 주제까지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그만큼 쌤은 시야가 넓다. 또 야사까지 짚을 정도로 박식하다.
닐 영과 밥 딜런의 음악이든, 제3세계 악기 얘기든,
현대 미술사든 반질 반질 윤이 나게 한바닥씩 풀어낸다.
인기 예능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면 제격일 인사다.
음악가로든, 이야기꾼으로든 '크렘 드 라 크렘'(CREME DE LA CREME · 최고 중의 최고)이다.
그간 기록의 주체로 자부심이 있던 쌤이 이 사진집에서는 피사체가 됐다고 한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타인의 렌즈 속에서 얼마나 웃으셨을까.
"크하하~. 양호하지 않아?"라며.
연합뉴스 문화부 이은정 차장
생애를 돌아보면, 내 청춘의 먼 곳에서 한대수의 노래가 들려온다.
한대수의 목소리는 깊고 두껍고, 멀리 닿는다.
한대수의 목소리는 거친 입자들을 뿜어내는데,
그 소리의 입자들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 입자들은 눈보라와 같고 안개와 같다.
한대수의 노래는 내가 살아온 그 억압의 시절에 자유의 바람을 몰아왔다.
그의 노래 속에서, 숲이 흔들리고 장대비가 쏟아지고
구름이 걷히고 젖은 산맥이 햇빛에 번쩍였다.
한대수는 억압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고통 속에서 기쁨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우리들은 모두 한대수의 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몇해 전 연말에 세시봉 디너쇼에 갔더니 한대수가 나왔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얘졌지만 한대수는 여전히 멋있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손바닥이 깨져라고 박수쳤다.
그날 한대수는 "이제 나이 먹어서 하룻밤에 네 번 화장실에 간다"고 말했다.
나는 세 번 간다.
한대수의 자전 에세이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을 읽으면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의 사랑법은 사랑의 기쁨과 행복,
슬픔과 고통을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끌어안고 딩굴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들은 본래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한대수의 노래가 그러하다.
소설가 김훈
....................
스무살때 처음 그의 앨범을 듣고 문화적 충격과 동시에
영원한 팬이 되어버린 나는 그후 음악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실제로도 그를 선생님 ,때론 선배님, 때론 형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다정한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한 대 수.........
나의 20대를 지탱시켜준 예술가.
지금까지도 나에겐 아주 소중하고 양호한 영양분이다.
한 : "오 ! 강 산 에 ! 오랜만~~ !"
강 : "형님을 알게되어 영광입니다 !"
"양호합니다 !"
가수 강산에
....................
시대를 100년만 더 거슬러 가도
한대수 ㆍ대수형 같은 자유 영혼이 많았을 게다.
이 시대는 사람들의 자잘한 잘못에 용서가 없는ㆍ용납되지 않는
그리고 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인색한 ㆍ빡빡한 시절이다.
참 재미없는 시절이다.
신촌 아지트 같은 공간에서ㆍ옥산나가 임신했다고 배를 만져보라고
내 손을 잡아 붙잡아 확인 시킨-
그 시간이 한참 흘러 반짝거리는
꼬마와 범상한 어른 사이에 영혼이
함께 흐르는 해류를 만들어간다.
새론 생명은 지친 영혼에게
새 우주 에너지를 빌려온다.
마치 숲 속ㆍ산 - 파도ㆍ바다가 그렇다.
신나는 시간이 펼쳐진다.
같이 가고 싶다.
대수의 길, 대양의 길에...
사진가 배병우
....................
자유하는 노래는 생명이다.
자유하는 노래는 혁명이다.
자유하는 노래는 존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을 최상이라 했다.
경계밖에 있는 사람,
자유 밖에 있는 사람, 한대수,
이미 경계 밖에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자유 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할 수 있다. 정신이다.
삭막했던 원시의 시대, 그의 노래는 물이었고 생명이었다.
한 마디의 말을 더 하는 것을 경계한다.
한대수! 그를 존경한다.
아티스트 김 아타
...................
난 한대수를 '쌤'이란 애칭으로 부른다.
'선생님'은 식상하게 격식을 차린 호칭 같고 자칭 '로큰롤 할배'라지만
그러기엔 쌤의 유머가 너무 팔팔해서다.
2006년인가, 쌤과 첫 인터뷰 때다.
쌤은 우리 대화 내용을 녹음하려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토씨 하나 틀리면 쌤의 1집 재킷 속 표정처럼
흰자를 반쯤 드러내고 따질 심산으로 보여 내심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자 쌤은 카세트 테이프에 견출지를 붙여
'한대수 인터뷰'라고 쓰고는 날짜까지 박았다.
"20년 있다가 내가 죽었을 때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가 추억이 될 겁니다.
선물해줄게요. 이 정도면 양호하죠?"
어떤 만남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배려에 놀랐고 생각지도 못한,
아날로그적인 선물에 감동했다.
되돌려 보면 쌤은 기록을 무척 좋아한다.
때론 기타와 투박한 목소리로, 카메라 렌즈로, 펜으로
시시콜콜한 개인사부터 세계 평화와 반핵,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 등
거시적인 주제까지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그만큼 쌤은 시야가 넓다. 또 야사까지 짚을 정도로 박식하다.
닐 영과 밥 딜런의 음악이든, 제3세계 악기 얘기든,
현대 미술사든 반질 반질 윤이 나게 한바닥씩 풀어낸다.
인기 예능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면 제격일 인사다.
음악가로든, 이야기꾼으로든 '크렘 드 라 크렘'(CREME DE LA CREME · 최고 중의 최고)이다.
그간 기록의 주체로 자부심이 있던 쌤이 이 사진집에서는 피사체가 됐다고 한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타인의 렌즈 속에서 얼마나 웃으셨을까.
"크하하~. 양호하지 않아?"라며.
연합뉴스 문화부 이은정 차장
한대수와 함께했던 신촌은 늘 그립다.
우리가 누비고 다니던 곳곳의 맛집들 그리고 그의 집 ‘고시원’.
사람을 좋아하는 그는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한다.
사람 한 명이 서있기도 좁은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들어내는 그의 요리는 어찌나 근사한지.
“미국에서 잠깐 이탈리안 새엄마랑 같이 살았거든. 우리가 사이가 서먹하고 대화도 잘 안 했는데,
그녀가 파스타 만드는 솜씨가 끝내 준거야. 내가 대학교를 가게 돼서 집을 떠나게 됐는데,
그때 이별 인사를 나누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파스타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지. 아하하!”
커다란 접시에 담긴 미트 파스타의 역사를 듣고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어느 저녁 냇킹콜을 들으면서 양호와 신나게 춤을 추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대수의 웃음소리는 늘 좋지만, 그날의 웃음소리는 특히 더 좋았다.
딸의 교육을 위해 나이 일흔에 뉴욕으로 떠난 아빠이기 전에
그는 어린 딸과 재즈를 들으며 춤을 추는 근사한 아빠였다.
고시원 한쪽 벽의 TV에는 늘 CNN이 켜져 있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TV볼륨이 크다.
그의 청력 기능 감퇴가 이유인지, 로커의 본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대수인가.
나는 그만큼 그의 지식과 관심사가 음악과 예술을 넘은 정치, 경제, 역사, 사회,
세계 전반의 최전선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죽음을 가장 자주 말하는 사람이다.
삶은 비극이라고, 인생은 고통이라고 확신하는 그는 “나는 곧 죽는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웃는다. 죽음을 확신하는 만큼 삶에 대한 애정도 확실히 갖고 있는 그다.
한대수가 살아온 시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나는 너무 좋다.
여성조선 임언영 기자
....................
사람들은 다가갈 수 없는
절대 존재 앞에 존경을 표한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음악은 그를 행복의 나라로 안내 했을것이다.
그는 이미 행복한 사람.
기타 하나에
두 딸(아내 옥사나, 평생 사랑할 딸 양호)만 있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넉넉할 자유인이다.
그가 걸어온
삶을 통해
내 인생을 반추해 본다.
사진가 고원재
....................
우리시대의 심성한 아티스트, 한대수
(심성 :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70세 노장의 인생..사랑..
그 예술적 깊이와 품격에 존경을 표한다.
음악감독 김인현
....................
한대수는 음악가다.
한대수는 노래를 부른다. “물 좀 주소”라고 부른다.
“물 좀 주소”는 자유를 구하는 노래다.
한대수는 자유를 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히피다.
한대수는 비틀즈다. 한대수는 밥 딜런이다. 한대수는 로큰롤러다.
한대수는 사이키델릭이다. 한대수는 Love & Peace다.
한대수는 부산에 태어나고 서울에 살고 뉴욕에 산다.
한대수는 국경을 넘은 지구인이다.
한대수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롭다.
한대수는 가정인이다.
좋은 남편이고 멋진 아버지다.
한대수는 멋진 우리 형님이다.
한대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훌륭한 셰프다.
한대수는 타이프라이터나 톱을 연주하는 전위예술가다.
한대수는 시인이다. 한대수는 문필가다. 한대수는 방송인이다.
그리고 한대수는 사진작가다. 여기 이곳에 있다.
곱창전골 Sato Yukie
....................
미국에서 1차 세계대전 후 전쟁에 대한 환멸로 촉발되었던 '로스트 제너레이션'과 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 했던 '비트제너레이션'운동,1950~54년도의 '메카시즘 이후
1960년대가 양산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 관계와 중국 모택동의 문화 혁명, 소련의 체코 침공 사건, 베트남 사건과 반전 운동, 체게바라 암살 사건, 마틴 루터킹 목사의 인종차별 운동과 존 F.케네디 암살 사건 등으로 인해 전위적 예술가들과 지식인, 가수들이 반전 평화와 신좌파주의 운동이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현되기 시작해 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문화 아이콘으로 형성케 되었 습니다.
팝음악에서는 지미 헨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과 짐 모리슨이 미국 전역을 히피 문화로 물들게 하는데 아이러니컬 하게 지미 핸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짐 모리슨 모두 27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요절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말 이러한 태풍급의 히피 바람이 불어닥쳤는데 히피문화는 청년문화였고, 그 중심에 있었던 한국 모던 포크의 개척자 ‘한대수’
17세 되던 때 미국에서 핵물리학자이셨던 부친의 의문의 사망 이후 도미 사진학을 대학에서 공부하신 후 히피 문화에 푹 빠진 채 68년 귀국해 '행복의 나라로'와 '물좀 주소'를 장발인 외모로 외쳤을 때 우리 사회는 그야 말로 혁명이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님의 곡들은 일제의 영향으로 도입된 왜색 문화의 상징인 트로트 중심의 식상된 한국 가요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여 놓았다는 찬사를 받으며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고 우리 포크와 락 음악의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 되었습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 군사 정부에 의한 유신이라는 독재의 사슬과 폭압이 당시의 천재 예술가인 한대수씨에게 퇴폐를 조장한다는 미명하에 국내에서의 방송 및 일체의 활동을 중지시키게 됩니다.
이후 김민기씨나 양희은씨 같은 현실 참여의 가수들이 나오게 되지만 이들 또한 군부 정부에 의해 방송 출연 금지 및 금지곡 판정을 받게 된 후 세계를 강타했던 히피 문화의 반전, 자유와 사랑의 추구-물론 진보적 예술가들과의 예술 활동도 엄격하게 통제받게 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불행히도 히피 문화 이후 진보적 문화와 예술은 세계적 반열과 함께 하지 못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포크 음악과 락 음악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거장!한대수!
이런 거장 중의 거장인 한대수씨와는 친형제 이상의 가족과도 같은 관계로 지내오며 동생과 형님으로 지내 오고 있습니다. 본인이 한대수 형님을 존경하고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일단 소탈하고 너무도 인간적 이어서 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솔직하십니다. 그 누구를 만나든지 하이파이브는 기본으로... 항시 만나면 반갑고 바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 만의 인간적인 매력에 자연히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문화,예술,철학,역사,정치 등의 다양한 분야의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입니다. 만나면 만날 수록 깊이와 다양성에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대한민국 구독률 1위인 조선일보에서 토요일 "사는게 제기랄"이라는 평론을 겸한 다양한 정치,문화, 예술 등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유명 작가가 된 이유는 그가 뮤지션 뿐만이 아니라 지적이고 현학적인 위대한 작가이자 문화 예술 평론가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는 철학적 면으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베품과 나눔의 철학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마인드가 남다른데 있습니다. 최근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최고위층과 부유층이 보여주고 있는 부정 부패와 갑질이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며 위화감을 조성시키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 철학으로서 한대수 형님이 늘 강조하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캐어링과 쉐어링! 즉 구제와 나눔의 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저 역시 구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문화 예술을 이해 못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지 못하는 이는 금수와 같다고 항시 제게 큰 가르침을 주셔온 한대수 형님!
우리 대중 음악의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아티스트이자 뮤지션이자 사진 작가이자 문화 예술 평론가 한대수! 가족 이상의 친분으로 형님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2017년 7월 30일
한대수 형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재즈 평론가 재즈리(이승준)
우리가 누비고 다니던 곳곳의 맛집들 그리고 그의 집 ‘고시원’.
사람을 좋아하는 그는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한다.
사람 한 명이 서있기도 좁은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들어내는 그의 요리는 어찌나 근사한지.
“미국에서 잠깐 이탈리안 새엄마랑 같이 살았거든. 우리가 사이가 서먹하고 대화도 잘 안 했는데,
그녀가 파스타 만드는 솜씨가 끝내 준거야. 내가 대학교를 가게 돼서 집을 떠나게 됐는데,
그때 이별 인사를 나누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파스타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지. 아하하!”
커다란 접시에 담긴 미트 파스타의 역사를 듣고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어느 저녁 냇킹콜을 들으면서 양호와 신나게 춤을 추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대수의 웃음소리는 늘 좋지만, 그날의 웃음소리는 특히 더 좋았다.
딸의 교육을 위해 나이 일흔에 뉴욕으로 떠난 아빠이기 전에
그는 어린 딸과 재즈를 들으며 춤을 추는 근사한 아빠였다.
고시원 한쪽 벽의 TV에는 늘 CNN이 켜져 있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TV볼륨이 크다.
그의 청력 기능 감퇴가 이유인지, 로커의 본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대수인가.
나는 그만큼 그의 지식과 관심사가 음악과 예술을 넘은 정치, 경제, 역사, 사회,
세계 전반의 최전선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죽음을 가장 자주 말하는 사람이다.
삶은 비극이라고, 인생은 고통이라고 확신하는 그는 “나는 곧 죽는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웃는다. 죽음을 확신하는 만큼 삶에 대한 애정도 확실히 갖고 있는 그다.
한대수가 살아온 시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나는 너무 좋다.
여성조선 임언영 기자
....................
사람들은 다가갈 수 없는
절대 존재 앞에 존경을 표한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음악은 그를 행복의 나라로 안내 했을것이다.
그는 이미 행복한 사람.
기타 하나에
두 딸(아내 옥사나, 평생 사랑할 딸 양호)만 있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넉넉할 자유인이다.
그가 걸어온
삶을 통해
내 인생을 반추해 본다.
사진가 고원재
....................
우리시대의 심성한 아티스트, 한대수
(심성 :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70세 노장의 인생..사랑..
그 예술적 깊이와 품격에 존경을 표한다.
음악감독 김인현
....................
한대수는 음악가다.
한대수는 노래를 부른다. “물 좀 주소”라고 부른다.
“물 좀 주소”는 자유를 구하는 노래다.
한대수는 자유를 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히피다.
한대수는 비틀즈다. 한대수는 밥 딜런이다. 한대수는 로큰롤러다.
한대수는 사이키델릭이다. 한대수는 Love & Peace다.
한대수는 부산에 태어나고 서울에 살고 뉴욕에 산다.
한대수는 국경을 넘은 지구인이다.
한대수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롭다.
한대수는 가정인이다.
좋은 남편이고 멋진 아버지다.
한대수는 멋진 우리 형님이다.
한대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훌륭한 셰프다.
한대수는 타이프라이터나 톱을 연주하는 전위예술가다.
한대수는 시인이다. 한대수는 문필가다. 한대수는 방송인이다.
그리고 한대수는 사진작가다. 여기 이곳에 있다.
곱창전골 Sato Yukie
....................
미국에서 1차 세계대전 후 전쟁에 대한 환멸로 촉발되었던 '로스트 제너레이션'과 2차 세계대전! 후에 등장 했던 '비트제너레이션'운동,1950~54년도의 '메카시즘 이후
1960년대가 양산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 관계와 중국 모택동의 문화 혁명, 소련의 체코 침공 사건, 베트남 사건과 반전 운동, 체게바라 암살 사건, 마틴 루터킹 목사의 인종차별 운동과 존 F.케네디 암살 사건 등으로 인해 전위적 예술가들과 지식인, 가수들이 반전 평화와 신좌파주의 운동이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현되기 시작해 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문화 아이콘으로 형성케 되었 습니다.
팝음악에서는 지미 헨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과 짐 모리슨이 미국 전역을 히피 문화로 물들게 하는데 아이러니컬 하게 지미 핸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짐 모리슨 모두 27세의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요절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말 이러한 태풍급의 히피 바람이 불어닥쳤는데 히피문화는 청년문화였고, 그 중심에 있었던 한국 모던 포크의 개척자 ‘한대수’
17세 되던 때 미국에서 핵물리학자이셨던 부친의 의문의 사망 이후 도미 사진학을 대학에서 공부하신 후 히피 문화에 푹 빠진 채 68년 귀국해 '행복의 나라로'와 '물좀 주소'를 장발인 외모로 외쳤을 때 우리 사회는 그야 말로 혁명이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님의 곡들은 일제의 영향으로 도입된 왜색 문화의 상징인 트로트 중심의 식상된 한국 가요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여 놓았다는 찬사를 받으며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고 우리 포크와 락 음악의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 되었습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 군사 정부에 의한 유신이라는 독재의 사슬과 폭압이 당시의 천재 예술가인 한대수씨에게 퇴폐를 조장한다는 미명하에 국내에서의 방송 및 일체의 활동을 중지시키게 됩니다.
이후 김민기씨나 양희은씨 같은 현실 참여의 가수들이 나오게 되지만 이들 또한 군부 정부에 의해 방송 출연 금지 및 금지곡 판정을 받게 된 후 세계를 강타했던 히피 문화의 반전, 자유와 사랑의 추구-물론 진보적 예술가들과의 예술 활동도 엄격하게 통제받게 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불행히도 히피 문화 이후 진보적 문화와 예술은 세계적 반열과 함께 하지 못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포크 음악과 락 음악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거장!한대수!
이런 거장 중의 거장인 한대수씨와는 친형제 이상의 가족과도 같은 관계로 지내오며 동생과 형님으로 지내 오고 있습니다. 본인이 한대수 형님을 존경하고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일단 소탈하고 너무도 인간적 이어서 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솔직하십니다. 그 누구를 만나든지 하이파이브는 기본으로... 항시 만나면 반갑고 바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 만의 인간적인 매력에 자연히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는 문화,예술,철학,역사,정치 등의 다양한 분야의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입니다. 만나면 만날 수록 깊이와 다양성에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대한민국 구독률 1위인 조선일보에서 토요일 "사는게 제기랄"이라는 평론을 겸한 다양한 정치,문화, 예술 등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유명 작가가 된 이유는 그가 뮤지션 뿐만이 아니라 지적이고 현학적인 위대한 작가이자 문화 예술 평론가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는 철학적 면으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베품과 나눔의 철학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마인드가 남다른데 있습니다. 최근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최고위층과 부유층이 보여주고 있는 부정 부패와 갑질이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며 위화감을 조성시키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 철학으로서 한대수 형님이 늘 강조하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캐어링과 쉐어링! 즉 구제와 나눔의 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저 역시 구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문화 예술을 이해 못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지 못하는 이는 금수와 같다고 항시 제게 큰 가르침을 주셔온 한대수 형님!
우리 대중 음악의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아티스트이자 뮤지션이자 사진 작가이자 문화 예술 평론가 한대수! 가족 이상의 친분으로 형님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2017년 7월 30일
한대수 형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재즈 평론가 재즈리(이승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