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력
강원 태백 출생
강원관광대학교 산업경영학과 졸업
“기억의 거울, 정미소”
사진을 ‘기억의 거울’이라고 할 때, 정미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김지연의 정미소 사진이 낫 설 수밖에 없다(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전혀 다르기에). 내게 정미소는 ‘그것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 그 이상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서문은 그 변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을 예술의 울타리 안에 담으려고 한다면 기존의 담론에 대한 중언부언이 되므로, 그러한 의미화의 길을 걷지 않고 아카이브라는 기록의 가치에 비중을 두고자 한다.
왜 아카이브인가?
동경대학교 사료편찬소에서는 그곳에 소장된 고문서나 고서, 고서화 그리고 명치 초기에 제작된 유리완판 등 여러 유형의 기록물들에 대한 보존 및 복원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복제본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원본들은 영구보존하고 복제 본을 활용 본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원본이 손망실될 경우 복제본이 원본의 가치를 대신 지니게 되는데, 여기서 사진은 원본이 남아있지 않은 화화(벽화) 작품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활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록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디지털 아카이브 작업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작업은 일본 자국에 관한 사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에서 생산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서간행회와 동양문고 및 동(同) 부설 유네스코동아시아문화 연구센터 등에서는 식민지배기에 출판된 각종 보고서와 서적 및 미간행 도서들을 영인본의 형태로 복간하고 있다. 여기서는 수많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유용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서(되살아난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망령든 문화제국주의이든), 사진 기록학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전망도 없는 이 땅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현상들이다. 최근 역사학계의 미시사적 관점에 의한 생활사연구자들의 증가와 더불어 당시의 사진이미지들을 역사기록물로서 재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나, 사진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은 아직 역부족인 상태다. 여러 국공립기관이나 개인에게 분산 방치되어있는, 특히 근대기의 한반도에서 생산된 수많은 사진기록물에 대한 관리체계의 수립이 필요한 때이다. 이때 김지연의 작업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진은 기록인가?
사진은 그 자체로 기록이 되는가? 투명론자들이 얘기하듯 사진은 그것이 재현하는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가? 그러나 사진이 바로 기록물이 되는 경우는 제한적이다. 사진이 어떤 대상에 대한 틀림없는 기록이라면, 명성황후의 초상사진에 대한 진위논란은 왜 일어나는가? 명성황후의 어떤 사진도 그것이 명성황후라는 것을 투명하게 얘기해주질 못한다. 사진의 맹점, 기록의로서 사진이 갖는 한계이다. ‘말로 된 초상’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사진이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말’이 함께 있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적 가치를 강조하는 대다수의 사진, 특히 포토저널리즘사진이나 다큐멘터리사진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제목으로하여(또는 캡션을 달아) ‘말’하고 있다. 그러한 ‘말’로서의 제목이 없다면, 그 사진의 기록성은 모호하게 된다(사진의 기록성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다. 여기서사진의 기록성은 사진으로부터가 아니라 말(텍스트)에 의해ㅅ 보장받고, 말의 추상성은 사진에 의해 구체화되는 상호규정의 관계가 형성된다). 결국 사진에 대한 문자적 기록이 병행될 때 비로소 그 사진은 기록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른바 이중부기가 일어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김지연의 정미소 사진은 기록물(아카이브)이 되기 위해 이러한 이중부기를 시도한다.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정미소
김지연의 정미소에 대한 사진적 기록은 그동안 역사적 서술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예술사진담론에서도 배제되어왔던 것으로 사적인 아카이브(private archives)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정미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개인과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맥을 같이 해왔다는 점에서 공적인 아카이브(public archives)로 거듭난다. 즉 그에게는 정미소를 찾아다니는 행위는 유녕의 기억, 할머니와의 기억을 더듬는 행위라고 진술되고 있지만, 대상이 주는 특별함이 우리를 근대의 기억으로 이끈다.
우리에게 정미소는 근대화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 소멸해가고 있는 집단적 기억의 기표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군량미 조달 및 식량수탈의 전초기지로서 항구도시와 철변을 중심으로 세워진 정미소는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떼돈을 버는 사업으로 소문이 나면서 우후죽순으로 문을 열었는데 물론 그곳의 주인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노동시간 조정, 직공대우 등을 조건으로 한 노동쟁의와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근대성의 양면을 보게 된다. 해방 이후 정미소는 생산의 상징/ 부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비효율성과 비경제성의 퇴락한 의미로 다가올 뿐이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숨 가쁘게 달려왔으나 결국 실패하고만 늙은 혁명가’(안도현, ‘정미소가 있는 풍경)라고 부른 한 시인의 표현처럼.
그의 사진에서 되살아난 정미소는 물론 일제시기의 그것과는 다른, 해방 이후 한국 농촌의 흥망성쇠와 함께해온 모습 그대로이다. 마을의 단위가 소규모 커뮤니티였기에 다른 나라와는 완연히 다른 독자적인 형태와 규모로 발전해온 정미소는, 그것이 위치하는 방식이 한국의 지형적 요소와 환경에 많이 기대고 있다(가옥과 지붕의 형태가 지역에 따라 다른 것처럼). 운반의 용이한을 위해 모든 길은 정미소로 이어지고, 따라서 그곳은 마을의 중정(中庭)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을을 관통하는 큰 길 옆에 서 있는 정미소의 형국이 그의 사진 속에 자주 비춘다.
정미소의 슬레이트 지붕과 함석지붕은 새마을운동이라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태어났지만 역설적이게 근대화를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지붕 밑으로 탈곡기와 정미기 그리고 발동기 등은 감춰져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의 크기와 배치에 따라 다양한 기하학적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정미소의 외관은 그것을 다른 건축물과 구분케 하고, 정미소의 기표로서 작용한다. 그것의 형태는 비록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지붕선이 이루는 둔각(鈍角)은 주위의 가옥이아 멀리 배경으로 서있는 산의 형세를 닮아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이제 퇴출만을 기다리는 정미소는 김지연의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 또는 전설이 될 것이다.
“기억의 거울, 정미소”
사진을 ‘기억의 거울’이라고 할 때, 정미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김지연의 정미소 사진이 낫 설 수밖에 없다(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전혀 다르기에). 내게 정미소는 ‘그것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 그 이상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서문은 그 변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을 예술의 울타리 안에 담으려고 한다면 기존의 담론에 대한 중언부언이 되므로, 그러한 의미화의 길을 걷지 않고 아카이브라는 기록의 가치에 비중을 두고자 한다.
왜 아카이브인가?
동경대학교 사료편찬소에서는 그곳에 소장된 고문서나 고서, 고서화 그리고 명치 초기에 제작된 유리완판 등 여러 유형의 기록물들에 대한 보존 및 복원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복제본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원본들은 영구보존하고 복제 본을 활용 본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원본이 손망실될 경우 복제본이 원본의 가치를 대신 지니게 되는데, 여기서 사진은 원본이 남아있지 않은 화화(벽화) 작품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활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록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디지털 아카이브 작업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작업은 일본 자국에 관한 사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에서 생산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서간행회와 동양문고 및 동(同) 부설 유네스코동아시아문화 연구센터 등에서는 식민지배기에 출판된 각종 보고서와 서적 및 미간행 도서들을 영인본의 형태로 복간하고 있다. 여기서는 수많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유용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떠나서(되살아난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망령든 문화제국주의이든), 사진 기록학에 대한 아무런 논의도 전망도 없는 이 땅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현상들이다. 최근 역사학계의 미시사적 관점에 의한 생활사연구자들의 증가와 더불어 당시의 사진이미지들을 역사기록물로서 재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나, 사진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은 아직 역부족인 상태다. 여러 국공립기관이나 개인에게 분산 방치되어있는, 특히 근대기의 한반도에서 생산된 수많은 사진기록물에 대한 관리체계의 수립이 필요한 때이다. 이때 김지연의 작업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진은 기록인가?
사진은 그 자체로 기록이 되는가? 투명론자들이 얘기하듯 사진은 그것이 재현하는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가? 그러나 사진이 바로 기록물이 되는 경우는 제한적이다. 사진이 어떤 대상에 대한 틀림없는 기록이라면, 명성황후의 초상사진에 대한 진위논란은 왜 일어나는가? 명성황후의 어떤 사진도 그것이 명성황후라는 것을 투명하게 얘기해주질 못한다. 사진의 맹점, 기록의로서 사진이 갖는 한계이다. ‘말로 된 초상’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사진이 기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말’이 함께 있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적 가치를 강조하는 대다수의 사진, 특히 포토저널리즘사진이나 다큐멘터리사진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제목으로하여(또는 캡션을 달아) ‘말’하고 있다. 그러한 ‘말’로서의 제목이 없다면, 그 사진의 기록성은 모호하게 된다(사진의 기록성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다. 여기서사진의 기록성은 사진으로부터가 아니라 말(텍스트)에 의해ㅅ 보장받고, 말의 추상성은 사진에 의해 구체화되는 상호규정의 관계가 형성된다). 결국 사진에 대한 문자적 기록이 병행될 때 비로소 그 사진은 기록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른바 이중부기가 일어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김지연의 정미소 사진은 기록물(아카이브)이 되기 위해 이러한 이중부기를 시도한다.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정미소
김지연의 정미소에 대한 사진적 기록은 그동안 역사적 서술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예술사진담론에서도 배제되어왔던 것으로 사적인 아카이브(private archives)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정미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개인과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맥을 같이 해왔다는 점에서 공적인 아카이브(public archives)로 거듭난다. 즉 그에게는 정미소를 찾아다니는 행위는 유녕의 기억, 할머니와의 기억을 더듬는 행위라고 진술되고 있지만, 대상이 주는 특별함이 우리를 근대의 기억으로 이끈다.
우리에게 정미소는 근대화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 소멸해가고 있는 집단적 기억의 기표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군량미 조달 및 식량수탈의 전초기지로서 항구도시와 철변을 중심으로 세워진 정미소는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떼돈을 버는 사업으로 소문이 나면서 우후죽순으로 문을 열었는데 물론 그곳의 주인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노동시간 조정, 직공대우 등을 조건으로 한 노동쟁의와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근대성의 양면을 보게 된다. 해방 이후 정미소는 생산의 상징/ 부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비효율성과 비경제성의 퇴락한 의미로 다가올 뿐이다. 과거의 영광이 현재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숨 가쁘게 달려왔으나 결국 실패하고만 늙은 혁명가’(안도현, ‘정미소가 있는 풍경)라고 부른 한 시인의 표현처럼.
그의 사진에서 되살아난 정미소는 물론 일제시기의 그것과는 다른, 해방 이후 한국 농촌의 흥망성쇠와 함께해온 모습 그대로이다. 마을의 단위가 소규모 커뮤니티였기에 다른 나라와는 완연히 다른 독자적인 형태와 규모로 발전해온 정미소는, 그것이 위치하는 방식이 한국의 지형적 요소와 환경에 많이 기대고 있다(가옥과 지붕의 형태가 지역에 따라 다른 것처럼). 운반의 용이한을 위해 모든 길은 정미소로 이어지고, 따라서 그곳은 마을의 중정(中庭)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을을 관통하는 큰 길 옆에 서 있는 정미소의 형국이 그의 사진 속에 자주 비춘다.
정미소의 슬레이트 지붕과 함석지붕은 새마을운동이라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태어났지만 역설적이게 근대화를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한 지붕 밑으로 탈곡기와 정미기 그리고 발동기 등은 감춰져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의 크기와 배치에 따라 다양한 기하학적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정미소의 외관은 그것을 다른 건축물과 구분케 하고, 정미소의 기표로서 작용한다. 그것의 형태는 비록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지붕선이 이루는 둔각(鈍角)은 주위의 가옥이아 멀리 배경으로 서있는 산의 형세를 닮아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이제 퇴출만을 기다리는 정미소는 김지연의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 또는 전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