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한문순 Han moonsoon : 여기, 우리가 만나는, Here we meet
P. 5
이번 전시 제목 '여기, 우리가 만나는'은 존 버거(John Berger)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라는 작품명을
오마주하여 지었습니다. 존 버거는 이 작품에서 각 장소마다 떠오르는,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과거의 인물들을
현재로 소환해 함께 장소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저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경험과 기억을
특정된 장소에 투영하여 진행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해당 장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존 버거와 함께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죽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들으면서 저는 리스본 광장에서 맛보았던 군밤과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맛보았던 해물밥의 황홀한 식감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존 버거가 느낀 우울한 크라쿠프가
아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으로 한껏 들뜬 활기찬 크라쿠프의 인상을, 마드리드에서는 타파스 바에서 맥주와
무료 안주를 유쾌한 현지인과 함께 즐겼던 제 행복한 경험을 존 버거에게 들려주고 싶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자신만의 경험을 은밀히 간직하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함께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인 안에서 은밀히 잠들어 있던 경험이 남들과 공유될 때, 사회적으로 변화되고
다른 이들의 경험과 결합하면서 생명력을 지닐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작품 제목을 오마주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저와 공유함으로써 저의 개인적 경험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존
버거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원래 제목에서 굳이 '곳'을 뺀 이유는 제 작품의 관심사가
'장소'가 아님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생명'에 대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번 개인전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환경과 동물 보호'라는 흔하다 못해 질려버린 식상한 레토릭이 아닌,
저만의 '생명'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제 작품에 등장하는 '생명'은 제가 이제껏 대면했던
'생명'입니다. 작품 속 생명들을 마주하는 순간 동안 개인적으로 만났던 '생명들'을 떠올려 저의 경험과 각자의
에를레프니스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존 버거의 작품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하며 마칩니다.
네가 찾아낸 것만 쓰렴.
제가 뭘 찾아낸 건지 끝끝내 모를 거예요.
그래, 끝내 모를 거야. 다만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지, 그것만큼은 알아야 해.
더 이상은 그걸 혼동하는 실수를 용납할 여지가 없으니까.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