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월간사진 201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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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혁명당 사건
무죄였던 무죄
1975년 4월 9일 흉 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의 중형이
내려진다. 그렇지만 흉악한 범죄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진다면 무
고하게 희생당하는 사람 역시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흔히 말하는 인민혁명당 사건. 1975년 4월 8월 대법원이
피의자들에게 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피고인 8명에 대한 사형
이 집행된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민청학련이라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 지
하조직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를 내린다. 중앙정
보부는 이들을 불순한 반정부 세력으로 규정했다. 이후 재판부는 1975년
4월 8일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확정된 후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외
에도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형이 4명에게 내려졌다. 줄여서 ‘인혁당 사
건’으로 불리는 이 역사는 국가가 법을 악용해 무고한 국민을 살해한 역사
이자, 박정희 정권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대표적 사례다. 이들의 재심
은 사형이 집행된 지 32년이 지난 2007년 이루어졌고,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음모, 반공법 위반 등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대내외적으로 ‘사법살인’
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국내 판사들에게도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
러운 재판으로 꼽히는 불행하고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이 집행된 4월 9일을 <사
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 날의 의미는 그만큼 판결과 집행이 불합
리했다는 뜻이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고문 흔적 사진
이일규 판사의 소수의견.
13명의 대법관 중 12명은 무고한 피고
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이일규 판사는 그들과는
다른 소수의견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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