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월간사진 201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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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불꽃이 타오르다
1960년 4월 19일 유 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
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
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 - 「대한민국헌법 전문」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
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을 통해 12년 동안
장기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1950년대 들어 국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승만의 장기독재
와 미국의 원조 감소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으로 기간산업 시설이 파괴됐고, 농촌경제 파탄으로 인구가 도시에 집
중됐으며, 실업자가 폭증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이승만 정권의 반민
주주의, 부정부패 등이었다. 또한, 친일파 청산에 소홀했고, 김구 암살 배
후에 이승만이 있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게다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
기 위해 ‘발췌개헌(1952)’을 했으며, ‘사사오입개헌(1954)’을 통해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함으로써 종신 집권까지 도모했다. 극에 달한 건 ‘3·15 부정선
거(1960)’였다.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수를 조작
했다. 한때 95~99%까지 득표율이 올랐지만, 하향 조작을 통해서 이승만은
약 89%, 이기붕은 약 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4월 11
일,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
올랐다. 이 참혹한 현장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었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의 서막이 올랐다.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
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민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무차별 발포로 사상
자가 증가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민주주의를 향한 뜨
거운 민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27개 대학 300여 명의 교수가 거리로 나왔고, 드디어 4월 26일 이
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피의 화요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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